노벨상 수상자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노벨상 수상자의 모습은 어떤가요? 아마도 백발의 노교수님이 조용한 대학 연구실 구석에서 칠판에 복잡한 수식을 적거나,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세상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모습일 겁니다. ‘돈보다는 명예, 비즈니스보다는 진리’를 외치는 고고한 학자의 이미지 말이죠. 하지만 2024년과 2025년의 노벨상 시상식은 이러한 이미지를 완전히 바꿨습니다.
2024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호명된 데미스 허사비스(Demis Hassabis)를 아시나요? 이분은 대학 교수가 아닙니다. 구글 딥마인드(Google DeepMind)의 CEO이자, 인공지능 신약 개발 기업인 '아이소모픽 랩스(Isomorphic Labs)'를 이끄는 경영자입니다. 그리고 불과 1년 뒤인 2025년, 노벨 경제학상은 "새로운 기업이 낡은 기업을 부수고 올라와야만 경제가 성장한다"는 'Creative Destruction Theory’을 증명한 필립 아기옹(Philippe Aghion) 교수에게 돌아갔습니다.

2024 노벨 화학상 수상자 데미스 허사비스. 고고한 노교수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보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제 과학은 단순히 자연의 비밀을 밝혀내는 발견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늘날의 과학은 실험실 문을 박차고 나와, 벤처 캐피털(VC)의 거대 자본을 만나고, 죽음의 계곡이라 불리는 험난한 창업의 길을 건너, 마침내 우리 삶을 바꾸는 혁신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어떻게 CEO가 되어 1조 원짜리 유니콘 기업을 만드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처절한 실패와 부활을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죽음의 계곡(Valley of Death)
스타트업 용어 중에 '죽음의 계곡(Valley of Death)'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술 개발에는 성공했지만, 제품을 시장에 내놓고 매출을 올리기 전까지 자금이 바닥나서 기업이 도산하는 공포의 구간을 말합니다다. 놀랍게도, 인류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는 노벨상 수상자들의 기술조차 이 계곡 앞에서 고난을 겪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더 가혹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1. 카탈린 카리코
가장 드라마틱한, 그리고 가장 가슴 아픈 사례는 2023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카탈린 카리코(Katalin Karikó)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이야 그녀를 'mRNA 백신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칭송하지만,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그녀는 학계의 아웃사이더였습니다.
2006년, 그녀는 동료인 드류 와이스먼과 함께 자신들이 발견한 mRNA 기술을 상용화하기 위해 'RNARx'라는 바이오 스타트업을 창업했습니다. 이 기술로 암도 고치고, 심장병도 고치겠다는 포부로 시작한 사업이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당시 투자자들은 "mRNA는 너무 불안정해서 약이 될 수 없다", "면역 반응 때문에 환자가 죽을 수도 있다"며 투자를 거절했습니다. VC들은 지갑을 닫았고, 정부 연구비 지원조차 끊겼습니다. 결국 RNARx는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더 비참한 건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녀가 소속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UPenn)의 기술이전센터는 그녀와 상의 없이 돈이 안 된다고 판단한 이 기술의 특허 라이선스를 외부 시약 판매 업체에 헐값(약 30만 달러 수준)에 매각해 버렸습니다. 자신이 평생을 바친 기술이 자신의 의지 없이 손을 떠나는 걸 지켜봐야 했던 심정이 어땠을까요?
하지만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창업은 망했지만 기술은 틀리지 않았다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2013년, 당시 독일의 이름 없는 벤처기업이었던 바이오엔텍(BioNTech)에 합류합니다. 부사장이라는 직함이었지만, 그녀는 60세가 가까운 나이에도 직접 실험복을 입고 벤치에서 피펫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2020년,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공포에 떨 때, 그녀의 끈기는 화이자-바이오엔텍 백신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카탈린 카리코. 미국 과학계에서 수많은 수모를 겪었지만 결국 노벨상과 사업 모두 성공하게 됩니다.
카리코의 사례는 우리에게 실패는 끝이 아니라 과정의 일부라는 교훈을 줍니다. 만약 그녀가 첫 번째 창업 실패에 좌절해 연구를 포기했다면, 인류는 팬데믹이라는 터널을 빠져나오는 데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릅니다.
2. 슈지 나카무라
또 다른 형태의 시련도 있습니다. 바로 '보상'과 '권리'에 대한 시련입니다. 201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슈지 나카무라(Shuji Nakamura) 교수의 이야기는 이를 보여줍니다.

슈지 나카무라. 청색 LED 발명이라는 엄청난 업적을 이뤘지만, 인정 받기에는 법적인 도움까지 필요했습니다.
그는 일본의 지방 중소기업인 '니치아 화학공업'의 평범한 연구원이었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는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던 '청색 LED'를 발명해냅니다. 이건 20세기 조명 산업의 혁명이었고, 회사는 이 기술로 수조 원의 매출을 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회사 규정에 따라 발명자인 나카무라에게 주어진 보너스는 얼마였을까요? 단돈 2만 엔(한화 약 20만 원)이었습니다.
분노한 나카무라는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전 직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일본 사회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직장인이 회사 월급 받고 발명한 건 회사 것 아니냐"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법원은 결국 나카무라의 손을 들어주며 8억 4천만 엔(약 84억 원)의 화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이 돈을 들고 그는 무엇을 했을까요? 은퇴해서 편하게 살았을까요? 아니요, 그는 다시 '소라(Soraa)'라는 스타트업을 창업했습니다. 완벽한 빛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이 발명한 LED 기술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GaN-on-GaN(질화갈륨 기판 위 질화갈륨)' 기술을 상용화했습니다. 이후에는 레이저 조명 회사인 'SLD Laser'를 창업했고, 이 회사는 2021년 교세라(Kyocera) 그룹에 100% 인수되며 거대한 성공(Exit)을 거둡니다.
나카무라 교수의 이야기는 '기술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시스템에서는 혁신이 지속될 수 없음을, 창업이 발명가가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피벗(Pivot)과 플랫폼 전략
모든 과학자가 고난만 겪는 건 아닙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벤처 캐피털리스트(VC) 심사역 뺨치는 비즈니스 감각으로 시장을 쥐락펴락하기도 합니다.
1. 제니퍼 다우드나
2020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이자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의 창시자인 제니퍼 다우드나(Jennifer Doudna) 교수를 봅시다. 그녀는 단순히 유전병 치료제를 만들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기술을 '플랫폼(Platform)'으로 정의했습니다.

제니퍼 다우드나. 연구 기술의 OS화를 이루어냈습니다.
스마트폰의 iOS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를 생각해보세요. 그 위에 게임도 올리고, 은행 앱도 올리죠? 다우드나는 CRISPR 기술을 바로 그런 OS처럼 만들었습니다. 다우드나의 CRISPR 기술에서 파생된 회사들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카리부 바이오사이언스(Caribou Biosciences): 농업부터 의학까지 범용 연구
- 인텔리아 테라퓨틱스(Intellia Therapeutics): 몸 안에서 유전자를 고치는 치료제 개발
- 맘모스 바이오사이언스(Mammoth Biosciences): 이게 핵심인데, 이 회사는 처음에 '치료제'가 아닌 '진단 키트' 시장을 노렸습니다. 신약 개발은 10년이 걸리지만, 진단 키트는 상대적으로 빨리 시장에 내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다. 코로나19 때 대박을 터뜨린 매머드는, 그렇게 번 돈과 데이터로 이제는 치료제 시장으로 피벗을 하고 있습니다.
VC들이 그녀에게 열광하는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하나가 실패해도 다른 곳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구조, 즉 포트폴리오가 탄탄하다는 거죠. 다우드나 교수는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탁월한 포트폴리오 매니저였던 겁니다.
2. 데이비드 베이커
2024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데이비드 베이커(David Baker) 교수의 전략은 물량 공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워싱턴 대학교에 '단백질 설계 연구소(Institute for Protein Design, IPD)'를 세웠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학교 연구실이 아닙니다. 사실상 거대한 컴퍼니 빌더(Company Builder)입니다.

데이비드 베이커. 단백질 설계 분야는 물론 연구자의 창업 시장도 개척하고 있습니다.
베이커 교수는 자신이 개발한 AI 단백질 설계 소프트웨어 '로제타(Rosetta)'의 소스 코드를 전 세계에 무료로 공개했습니다. 그러자 전 세계의 천재들이 이 코드를 쓰러 몰려들었죠. 베이커 교수는 제자들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낼 때마다 논문만 쓰지 말고 창업해 보라며 등을 떠밀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IPD에서만 20개가 넘는 스타트업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중 '아이코사박스(Icosavax)'라는 백신 회사는 아스트라제네카에 1조 원 넘는 금액에 인수되었고, 2024년 4월에 런칭한 '자이라 테라퓨틱스(Xaira Therapeutics)'는 시작하자마자 무려 10억 달러(약 1조 4천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습니다.
베이커 교수의 사례는 대학이 곧 최고의 인큐베이터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교수는 기술 고문 역할을 하고, 혈기 왕성한 제자들이 CEO가 되어 시장에 뛰어드는 이 모델은 지금 전 세계 바이오 씬의 표준이 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3. 벤처 크리에이션
앞서 본 카리코 박사의 사례가 고난을 뚫고 성공한 사례라면, 최근 바이오 업계에는 온실 속 화초처럼 정교하게 기획된 사례들도 있습니다. 바로 '벤처 크리에이션(Venture Creation)' 모델입니다.
모더나(Moderna)를 탄생시킨 벤처캐피털 '플래그십 파이어니어링(Flagship Pioneering)'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대학 연구실에서 논문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대신 "만약 mRNA로 약을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라는 가설을 먼저 세우고, 그에 맞는 기술을 가진 교수를 찾아가 회사를 함께 설립합니다. 과학자는 기술을 대고, 전문 경영인은 자본과 경영을 맡는 철저한 분업화를 통해 사업을 성장시키고 있습니다.


플래그십 파이어니어링은 최근 삼성과도 MOU를 맺었습니다.이 모델은 과학자가 겪어야 할 죽음의 계곡에 튼튼한 다리를 놓아줍니다. 연구자는 복잡한 재무제표나 투자 계약서 대신 실험이나 데이터 분석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죠. 2024년과 2025년에 등장한 수많은 유니콘 기업들이 바로 이런 시스템 하에서 탄생했습니다. 이제 창업은 창업을 원하는 과학자 혼자 짊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과학자-기획자-투자자가 함께 만드는 정교한 사업이 될 수 있습니다.
창조적 파괴
올해를 한 번 되돌아볼까요? 올해 노벨상의 키워드는 단연 '딥테크(Deep Tech)'와 '경제 성장'입니다.
1. MOF(금속-유기 골격체)
2025년 노벨 화학상은 '나노 스펀지'라고 불리는 신소재, MOF를 개발한 과학자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일본 교토대의 스스무 키타가와(Susumu Kitagawa) 교수와 미국 UC버클리의 오마르 야기(Omar Yaghi) 교수가 그 주인공입니다.

2025년 노벨화학상. “MOF”의 발명
키타가와 교수는 '아토미스(Atomis)'라는 스타트업을 세워, 가볍고 안전한 차세대 가스통 '큐비탄(CubiTan)'을 만들었습니다. 무거운 강철 가스통 대신 MOF가 채워진 가벼운 통에 가스를 압축해 드론으로 배달하는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다이킨(Daikin) 같은 대기업이 여기에 거액을 투자했습니다. 오마르 야기 교수가 창업한 '누맷 테크놀로지스(NuMat Technologies)'는 반도체 공장에서 나오는 맹독성 가스를 안전하게 포집하는 기술을 팝니다. 더 나아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여 물을 만드는 기술까지 상용화하고 있죠.
이것이 바로 딥테크 창업입니다. 앱이나 웹사이트를 만드는 게 아니라, 소재와 하드웨어를 혁신해 기후 위기 같은 인류의 난제를 해결하는 비즈니스입니다. VC들도 이제 진짜 세상을 바꾸는 아이디어를 원하는 분위기이고, 이들에게 돈을 싸 들고 가고 있습니다.
2. 창조적 파괴
이 현상을 경제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해 준 것이 2025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필립 아기옹(Philippe Mario Aghion) 교수의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 이론입니다.

필립 아기옹. 새롭고 더 나은 기술이 등장하면 기존 산업이 도태되는 과정을 통해 경제가 발전한다는 슘페터의 이론을 현대 경제학에 정식으로 통합했습니다.
아기옹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경제는 평온하게 성장하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을 가진 혁신 기업이, 낡은 기술을 가진 기득권 기업을 밀어내고 파괴할 때, 비로소 성장이 일어난다."
202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알랭 아스펙트가 만든 양자 컴퓨터 회사 '파스칼(Pasqal)'이 성장하면, 기존의 슈퍼컴퓨터 회사들은 위기를 맞습니다. 누맷의 가스 저장 기술이 뜨면, 무거운 강철통을 만들던 회사는 망할지도 모릅니다. 잔인해 보이나요? 하지만 아기옹 교수는 이것이 건강한 파괴라고 말합니다. 낡은 세포가 죽고 새 세포가 돋아나야 몸이 건강하듯이, 경제도 이런 신진대사가 필수적이라는 거죠.
노벨상 수상자들의 창업은 단순한 돈벌이가 아닙니다. 그들은 경제 생태계에 끊임없이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 낡은 질서를 파괴하며 인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엔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혁신의 역설
우리가 2024년 노벨상을 기억할 때, 화학상의 데미스 허사비스가 AI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면, 물리학상을 수상한 제프리 힌턴(Geoffrey Hinton) 교수는 AI의 위험성을 경고했습니다. 딥러닝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는 자신이 평생을 바친 기술이 인류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70대의 나이에 구글을 퇴사하며 자유로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제프리 힌턴. 인공신경망을 통해 머신러닝을 가능하게 해 노벨상을 수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국제적 범위의 AI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Future of Life 재단의 인공지능 개발 일시 중단 성명서에 서명했습니다.이것은 과학자-창업가에게 또 다른 중요한 화두를 던집니다. 단순히 기술을 상용화해서 돈을 버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을 만들고 고뇌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딥테크 창업가들은 AI 안전, 유전자 편집의 윤리, 기후 기술의 부작용까지 고민해야 하는 위치에 섰습니다.
진정한 혁신가는 엑셀러레이터만 밟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만든 기술이 괴물이 되어 세상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적절한 시점에 브레이크를 걸고 안전장치를 설계하는 것 또한 노벨상급 과학자들의 의무이자 비즈니스의 핵심 경쟁력이 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 실리콘밸리에서는 기술력만큼이나 AI 윤리 가이드라인이나 통제 가능한 시스템을 갖춘 스타트업이 더 높은 밸류에이션을 받는 추세입니다. 이는 과학자의 양심이 곧 비즈니스의 리스크 관리 능력이 되는 시대가 왔음을 의미합니다.
4. 왜 지금인가?
그렇다면 왜 하필 지금, 2020년대 중반에 들어서 과학자들이 대거 창업 전선에 뛰어드는 걸까요? 단지 돈을 벌고 싶어서일까요? 근본적인 이유는 인류가 직면한 문제의 난이도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과거, 페니실린이나 X-ray 같은 위대한 발견은 소규모 실험실에서 우연과 개인의 천재성에 의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기후 위기를 해결할 탄소 포집 기술, 치매를 정복할 신약, 우주를 개척할 로켓 기술은 대학 연구실의 연구비로는 어림도 없는 거대 자본과 인프라를 필요로 합니다.
이제 쉬운 과학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복잡하게 얽힌 난제들을 풀기 위해서는 수천억 원의 서버 비용이 드는 AI를 돌려야 하고, 수만 명의 환자 데이터를 분석해야 합니다. 과학이 실험실을 나와 VC의 자본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때문이 아니라, 그래야만 이 거대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규모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데미스 허사비스가 구글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 딥마인드를 키운 것은, 그것이 AI라는 거대한 파도를 타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학자-창업가
과거에는 과학자가 "이 기술로 돈을 벌겠다"고 하면 속물이라며 손가락질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데미스 허사비스가 보여주듯, 가장 뛰어난 과학자가 가장 혁신적인 CEO가 되는 시대가 왔습니다. 실험실의 발견이 논문에만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지식에 불과하지만, 창업을 통해 시장에 나오면 세상을 바꾸는 솔루션이 됩니다.
물론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카리코 박사처럼 40년을 무명으로 지낼 수도 있고, 나카무라 교수처럼 회사와 법정 싸움을 벌여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자신의 기술로 세상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2024년과 2025년의 노벨상은 우리에게 융합이라는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습니다.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연구자의 집요함과, 그 해답을 집요하게 시장에 증명하려는 창업가의 실행력이 더 이상 서로 다른 영역이 아님을 확인하는 중입니다. 깊은 기초 과학의 토양이 있어야만 위대한 딥테크 기업이 자라날 수 있고, 반대로 치열한 시장의 검증을 통과해야만 실험실의 기술은 비로소 인류의 삶 속에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과학자이자 창업가인 분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노벨상 수상자의 모습은 어떤가요? 아마도 백발의 노교수님이 조용한 대학 연구실 구석에서 칠판에 복잡한 수식을 적거나,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세상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모습일 겁니다. ‘돈보다는 명예, 비즈니스보다는 진리’를 외치는 고고한 학자의 이미지 말이죠. 하지만 2024년과 2025년의 노벨상 시상식은 이러한 이미지를 완전히 바꿨습니다.
2024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호명된 데미스 허사비스(Demis Hassabis)를 아시나요? 이분은 대학 교수가 아닙니다. 구글 딥마인드(Google DeepMind)의 CEO이자, 인공지능 신약 개발 기업인 '아이소모픽 랩스(Isomorphic Labs)'를 이끄는 경영자입니다. 그리고 불과 1년 뒤인 2025년, 노벨 경제학상은 "새로운 기업이 낡은 기업을 부수고 올라와야만 경제가 성장한다"는 'Creative Destruction Theory’을 증명한 필립 아기옹(Philippe Aghion) 교수에게 돌아갔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제 과학은 단순히 자연의 비밀을 밝혀내는 발견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늘날의 과학은 실험실 문을 박차고 나와, 벤처 캐피털(VC)의 거대 자본을 만나고, 죽음의 계곡이라 불리는 험난한 창업의 길을 건너, 마침내 우리 삶을 바꾸는 혁신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어떻게 CEO가 되어 1조 원짜리 유니콘 기업을 만드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처절한 실패와 부활을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죽음의 계곡(Valley of Death)
스타트업 용어 중에 '죽음의 계곡(Valley of Death)'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술 개발에는 성공했지만, 제품을 시장에 내놓고 매출을 올리기 전까지 자금이 바닥나서 기업이 도산하는 공포의 구간을 말합니다다. 놀랍게도, 인류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는 노벨상 수상자들의 기술조차 이 계곡 앞에서 고난을 겪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더 가혹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1. 카탈린 카리코
가장 드라마틱한, 그리고 가장 가슴 아픈 사례는 2023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카탈린 카리코(Katalin Karikó)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이야 그녀를 'mRNA 백신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칭송하지만,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그녀는 학계의 아웃사이더였습니다.
2006년, 그녀는 동료인 드류 와이스먼과 함께 자신들이 발견한 mRNA 기술을 상용화하기 위해 'RNARx'라는 바이오 스타트업을 창업했습니다. 이 기술로 암도 고치고, 심장병도 고치겠다는 포부로 시작한 사업이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당시 투자자들은 "mRNA는 너무 불안정해서 약이 될 수 없다", "면역 반응 때문에 환자가 죽을 수도 있다"며 투자를 거절했습니다. VC들은 지갑을 닫았고, 정부 연구비 지원조차 끊겼습니다. 결국 RNARx는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더 비참한 건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녀가 소속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UPenn)의 기술이전센터는 그녀와 상의 없이 돈이 안 된다고 판단한 이 기술의 특허 라이선스를 외부 시약 판매 업체에 헐값(약 30만 달러 수준)에 매각해 버렸습니다. 자신이 평생을 바친 기술이 자신의 의지 없이 손을 떠나는 걸 지켜봐야 했던 심정이 어땠을까요?
하지만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창업은 망했지만 기술은 틀리지 않았다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2013년, 당시 독일의 이름 없는 벤처기업이었던 바이오엔텍(BioNTech)에 합류합니다. 부사장이라는 직함이었지만, 그녀는 60세가 가까운 나이에도 직접 실험복을 입고 벤치에서 피펫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2020년,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공포에 떨 때, 그녀의 끈기는 화이자-바이오엔텍 백신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카탈린 카리코. 미국 과학계에서 수많은 수모를 겪었지만 결국 노벨상과 사업 모두 성공하게 됩니다.
카리코의 사례는 우리에게 실패는 끝이 아니라 과정의 일부라는 교훈을 줍니다. 만약 그녀가 첫 번째 창업 실패에 좌절해 연구를 포기했다면, 인류는 팬데믹이라는 터널을 빠져나오는 데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릅니다.
2. 슈지 나카무라
또 다른 형태의 시련도 있습니다. 바로 '보상'과 '권리'에 대한 시련입니다. 201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슈지 나카무라(Shuji Nakamura) 교수의 이야기는 이를 보여줍니다.
슈지 나카무라. 청색 LED 발명이라는 엄청난 업적을 이뤘지만, 인정 받기에는 법적인 도움까지 필요했습니다.
그는 일본의 지방 중소기업인 '니치아 화학공업'의 평범한 연구원이었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는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던 '청색 LED'를 발명해냅니다. 이건 20세기 조명 산업의 혁명이었고, 회사는 이 기술로 수조 원의 매출을 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회사 규정에 따라 발명자인 나카무라에게 주어진 보너스는 얼마였을까요? 단돈 2만 엔(한화 약 20만 원)이었습니다.
분노한 나카무라는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전 직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일본 사회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직장인이 회사 월급 받고 발명한 건 회사 것 아니냐"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법원은 결국 나카무라의 손을 들어주며 8억 4천만 엔(약 84억 원)의 화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이 돈을 들고 그는 무엇을 했을까요? 은퇴해서 편하게 살았을까요? 아니요, 그는 다시 '소라(Soraa)'라는 스타트업을 창업했습니다. 완벽한 빛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이 발명한 LED 기술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GaN-on-GaN(질화갈륨 기판 위 질화갈륨)' 기술을 상용화했습니다. 이후에는 레이저 조명 회사인 'SLD Laser'를 창업했고, 이 회사는 2021년 교세라(Kyocera) 그룹에 100% 인수되며 거대한 성공(Exit)을 거둡니다.
나카무라 교수의 이야기는 '기술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시스템에서는 혁신이 지속될 수 없음을, 창업이 발명가가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피벗(Pivot)과 플랫폼 전략
모든 과학자가 고난만 겪는 건 아닙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벤처 캐피털리스트(VC) 심사역 뺨치는 비즈니스 감각으로 시장을 쥐락펴락하기도 합니다.
1. 제니퍼 다우드나
2020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이자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의 창시자인 제니퍼 다우드나(Jennifer Doudna) 교수를 봅시다. 그녀는 단순히 유전병 치료제를 만들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기술을 '플랫폼(Platform)'으로 정의했습니다.
제니퍼 다우드나. 연구 기술의 OS화를 이루어냈습니다.
스마트폰의 iOS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를 생각해보세요. 그 위에 게임도 올리고, 은행 앱도 올리죠? 다우드나는 CRISPR 기술을 바로 그런 OS처럼 만들었습니다. 다우드나의 CRISPR 기술에서 파생된 회사들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VC들이 그녀에게 열광하는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하나가 실패해도 다른 곳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구조, 즉 포트폴리오가 탄탄하다는 거죠. 다우드나 교수는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탁월한 포트폴리오 매니저였던 겁니다.
2. 데이비드 베이커
2024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데이비드 베이커(David Baker) 교수의 전략은 물량 공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워싱턴 대학교에 '단백질 설계 연구소(Institute for Protein Design, IPD)'를 세웠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학교 연구실이 아닙니다. 사실상 거대한 컴퍼니 빌더(Company Builder)입니다.
데이비드 베이커. 단백질 설계 분야는 물론 연구자의 창업 시장도 개척하고 있습니다.
베이커 교수는 자신이 개발한 AI 단백질 설계 소프트웨어 '로제타(Rosetta)'의 소스 코드를 전 세계에 무료로 공개했습니다. 그러자 전 세계의 천재들이 이 코드를 쓰러 몰려들었죠. 베이커 교수는 제자들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낼 때마다 논문만 쓰지 말고 창업해 보라며 등을 떠밀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IPD에서만 20개가 넘는 스타트업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중 '아이코사박스(Icosavax)'라는 백신 회사는 아스트라제네카에 1조 원 넘는 금액에 인수되었고, 2024년 4월에 런칭한 '자이라 테라퓨틱스(Xaira Therapeutics)'는 시작하자마자 무려 10억 달러(약 1조 4천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습니다.
베이커 교수의 사례는 대학이 곧 최고의 인큐베이터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교수는 기술 고문 역할을 하고, 혈기 왕성한 제자들이 CEO가 되어 시장에 뛰어드는 이 모델은 지금 전 세계 바이오 씬의 표준이 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3. 벤처 크리에이션
앞서 본 카리코 박사의 사례가 고난을 뚫고 성공한 사례라면, 최근 바이오 업계에는 온실 속 화초처럼 정교하게 기획된 사례들도 있습니다. 바로 '벤처 크리에이션(Venture Creation)' 모델입니다.
모더나(Moderna)를 탄생시킨 벤처캐피털 '플래그십 파이어니어링(Flagship Pioneering)'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대학 연구실에서 논문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대신 "만약 mRNA로 약을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라는 가설을 먼저 세우고, 그에 맞는 기술을 가진 교수를 찾아가 회사를 함께 설립합니다. 과학자는 기술을 대고, 전문 경영인은 자본과 경영을 맡는 철저한 분업화를 통해 사업을 성장시키고 있습니다.


플래그십 파이어니어링은 최근 삼성과도 MOU를 맺었습니다.이 모델은 과학자가 겪어야 할 죽음의 계곡에 튼튼한 다리를 놓아줍니다. 연구자는 복잡한 재무제표나 투자 계약서 대신 실험이나 데이터 분석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죠. 2024년과 2025년에 등장한 수많은 유니콘 기업들이 바로 이런 시스템 하에서 탄생했습니다. 이제 창업은 창업을 원하는 과학자 혼자 짊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과학자-기획자-투자자가 함께 만드는 정교한 사업이 될 수 있습니다.
창조적 파괴
올해를 한 번 되돌아볼까요? 올해 노벨상의 키워드는 단연 '딥테크(Deep Tech)'와 '경제 성장'입니다.
1. MOF(금속-유기 골격체)
2025년 노벨 화학상은 '나노 스펀지'라고 불리는 신소재, MOF를 개발한 과학자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일본 교토대의 스스무 키타가와(Susumu Kitagawa) 교수와 미국 UC버클리의 오마르 야기(Omar Yaghi) 교수가 그 주인공입니다.
2025년 노벨화학상. “MOF”의 발명
키타가와 교수는 '아토미스(Atomis)'라는 스타트업을 세워, 가볍고 안전한 차세대 가스통 '큐비탄(CubiTan)'을 만들었습니다. 무거운 강철 가스통 대신 MOF가 채워진 가벼운 통에 가스를 압축해 드론으로 배달하는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다이킨(Daikin) 같은 대기업이 여기에 거액을 투자했습니다. 오마르 야기 교수가 창업한 '누맷 테크놀로지스(NuMat Technologies)'는 반도체 공장에서 나오는 맹독성 가스를 안전하게 포집하는 기술을 팝니다. 더 나아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여 물을 만드는 기술까지 상용화하고 있죠.
이것이 바로 딥테크 창업입니다. 앱이나 웹사이트를 만드는 게 아니라, 소재와 하드웨어를 혁신해 기후 위기 같은 인류의 난제를 해결하는 비즈니스입니다. VC들도 이제 진짜 세상을 바꾸는 아이디어를 원하는 분위기이고, 이들에게 돈을 싸 들고 가고 있습니다.
2. 창조적 파괴
이 현상을 경제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해 준 것이 2025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필립 아기옹(Philippe Mario Aghion) 교수의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 이론입니다.
필립 아기옹. 새롭고 더 나은 기술이 등장하면 기존 산업이 도태되는 과정을 통해 경제가 발전한다는 슘페터의 이론을 현대 경제학에 정식으로 통합했습니다.
아기옹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경제는 평온하게 성장하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을 가진 혁신 기업이, 낡은 기술을 가진 기득권 기업을 밀어내고 파괴할 때, 비로소 성장이 일어난다."
202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알랭 아스펙트가 만든 양자 컴퓨터 회사 '파스칼(Pasqal)'이 성장하면, 기존의 슈퍼컴퓨터 회사들은 위기를 맞습니다. 누맷의 가스 저장 기술이 뜨면, 무거운 강철통을 만들던 회사는 망할지도 모릅니다. 잔인해 보이나요? 하지만 아기옹 교수는 이것이 건강한 파괴라고 말합니다. 낡은 세포가 죽고 새 세포가 돋아나야 몸이 건강하듯이, 경제도 이런 신진대사가 필수적이라는 거죠.
노벨상 수상자들의 창업은 단순한 돈벌이가 아닙니다. 그들은 경제 생태계에 끊임없이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 낡은 질서를 파괴하며 인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엔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혁신의 역설
우리가 2024년 노벨상을 기억할 때, 화학상의 데미스 허사비스가 AI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면, 물리학상을 수상한 제프리 힌턴(Geoffrey Hinton) 교수는 AI의 위험성을 경고했습니다. 딥러닝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는 자신이 평생을 바친 기술이 인류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70대의 나이에 구글을 퇴사하며 자유로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제프리 힌턴. 인공신경망을 통해 머신러닝을 가능하게 해 노벨상을 수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국제적 범위의 AI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Future of Life 재단의 인공지능 개발 일시 중단 성명서에 서명했습니다.이것은 과학자-창업가에게 또 다른 중요한 화두를 던집니다. 단순히 기술을 상용화해서 돈을 버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을 만들고 고뇌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딥테크 창업가들은 AI 안전, 유전자 편집의 윤리, 기후 기술의 부작용까지 고민해야 하는 위치에 섰습니다.
진정한 혁신가는 엑셀러레이터만 밟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만든 기술이 괴물이 되어 세상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적절한 시점에 브레이크를 걸고 안전장치를 설계하는 것 또한 노벨상급 과학자들의 의무이자 비즈니스의 핵심 경쟁력이 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 실리콘밸리에서는 기술력만큼이나 AI 윤리 가이드라인이나 통제 가능한 시스템을 갖춘 스타트업이 더 높은 밸류에이션을 받는 추세입니다. 이는 과학자의 양심이 곧 비즈니스의 리스크 관리 능력이 되는 시대가 왔음을 의미합니다.
4. 왜 지금인가?
그렇다면 왜 하필 지금, 2020년대 중반에 들어서 과학자들이 대거 창업 전선에 뛰어드는 걸까요? 단지 돈을 벌고 싶어서일까요? 근본적인 이유는 인류가 직면한 문제의 난이도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과거, 페니실린이나 X-ray 같은 위대한 발견은 소규모 실험실에서 우연과 개인의 천재성에 의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기후 위기를 해결할 탄소 포집 기술, 치매를 정복할 신약, 우주를 개척할 로켓 기술은 대학 연구실의 연구비로는 어림도 없는 거대 자본과 인프라를 필요로 합니다.
이제 쉬운 과학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복잡하게 얽힌 난제들을 풀기 위해서는 수천억 원의 서버 비용이 드는 AI를 돌려야 하고, 수만 명의 환자 데이터를 분석해야 합니다. 과학이 실험실을 나와 VC의 자본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때문이 아니라, 그래야만 이 거대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규모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데미스 허사비스가 구글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 딥마인드를 키운 것은, 그것이 AI라는 거대한 파도를 타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학자-창업가
과거에는 과학자가 "이 기술로 돈을 벌겠다"고 하면 속물이라며 손가락질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데미스 허사비스가 보여주듯, 가장 뛰어난 과학자가 가장 혁신적인 CEO가 되는 시대가 왔습니다. 실험실의 발견이 논문에만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지식에 불과하지만, 창업을 통해 시장에 나오면 세상을 바꾸는 솔루션이 됩니다.
물론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카리코 박사처럼 40년을 무명으로 지낼 수도 있고, 나카무라 교수처럼 회사와 법정 싸움을 벌여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자신의 기술로 세상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2024년과 2025년의 노벨상은 우리에게 융합이라는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습니다.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연구자의 집요함과, 그 해답을 집요하게 시장에 증명하려는 창업가의 실행력이 더 이상 서로 다른 영역이 아님을 확인하는 중입니다. 깊은 기초 과학의 토양이 있어야만 위대한 딥테크 기업이 자라날 수 있고, 반대로 치열한 시장의 검증을 통과해야만 실험실의 기술은 비로소 인류의 삶 속에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과학자이자 창업가인 분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습니다.